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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연수·세미나] 벽에 새긴 총탄자국과 비극을 마주보는 날
    • 관리자
    • 업데이트 2023-10-12 20:11
    • 조회수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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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북 영동군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 역사 바로알기’  

     

    36도의 더위보다 강렬한 것은 총탄자국들이었다. 충북 영동군 노근리의 쌍굴다리는 멀리서 보면 평범한 시골동네의 작달막한 다리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하얀 자국들이 빽빽이 들이차있다. 이곳에 새겨진 자국들은 73년전 5일간 민간을 향한 소총과 기관총이 남긴 상처다. 동행한 선후배들의 표정은 굳어져있었다. 무더위 속 노근리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충북기자협회가 주최하고 한국기자협회, 인천경기기자협회, 경남울산기자협회, 전북기자협회, 제주기자협회 30여명의 회원들이 참여한 자리서 정구도 이사장은 배경을 설명했다. 6·25 전쟁이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3일, 영동군 및 타 지역 주민 500여명이 미 육군의 유도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을 벌였다. 이어 25일부터 29일, 남쪽으로 피난하는 피난민들을 향해 미군은 총을 쐈다. 이는 피난 민 중 민간인으로 가장한 북한 육군 병력이 숨어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990년대까지 정부는 눈을 부라렸고 피해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날 동행한 양해찬 노근리 희생자유족회장은 “10살에 겪은 일이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라며 벽에 새겨진 총알의 흔적을 설명했다. 양 회장은 “지금처럼 더운 날, 5일간 총탄들이 쏟아졌다, 끊임없이…”라며 벽을 오래 바라보았다.

    1994년, 피해자 중 한 명인 정은용 씨는 노근리 사건에 대한 장편소설 ‘그대 우리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다. 문제를 공식화 할 수 없었기에 소설로 발표한 것이다. 그의 아들인 정구도  

     

    이사장은 “모두들 사회의 불이익을 무서워했다. 그러나 그대로 입을 다물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피해자대책위를 만들어 미국대사관을 찾아가고, 수십 차례 기자회견을 했으며, 명확한 자료를 모았다. 이 노력은 외신으로 이어져,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에서 탐사보도를 발표한 이후, 한미 양국 정부는 1999년 10월 공동조사에 착수해 2001년 1월에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여전히 배상문제는 이뤄지지 않았고, 살아남은 피해자들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문제는 덮기 쉽고, 입을 다물면 모두가 편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묻힌 상처와 기억을 복원하고, 남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증명했다.

     

    저녁에 모두들 “내가 그런 상황에 기자였다면”이라고 입을 떼었다. 권력기관에 사찰당하고,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고, 데스크들은 기사를 뭉개고… 가만히 있으면 편한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겼다. 헛수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 억울함을 말하는 울먹이는 말을 향해, 귀를 열어야 한다. 그것이 기자가 할 일이므로.

     

                                                                                                                                                                                                                                          <전북도민일보 이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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